서리와 쓰리
서리와 쓰리
  • 최태호 스폐셜 컬럼
  • 승인 2019.11.0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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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br>최태호 교수
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
최태호 교수

[국민투데이 전문가 칼럼=최태호 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어린 시절의 참외서리는 항상 가슴을 뛰게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필자는 새가슴이다. 간이 콩알보다도 작다. 친구들이 서리해 온 참외를 먹을 때는 1등이지만 서리하러 갈 때면 항상 꼴찌다. 골찌일 뿐만 아니라 서리도 못한다. 친구나 형들이 참외밭을 누비고 다니고, 때로는 남의 참외 마구 밟아 뭉개고 다녀도 필자는 그저 망을 보든가, 도망갈 궁리만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달리기는 참 잘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육상부에서 활동했으니 잘 뛰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참외 서리하면서 도망가던 실력이 남아서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서리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주인 몰래 훔쳐 먹는 장난을 하다” 혹은 “떼를 지어 남의 과일, 곡식,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을 하다”라고 나타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장난으로 훔쳐 먹다’라는 말이다. 서리하는 친구들도 먹을 만큼만 훔쳐야지 지나치게 많이 훔쳐 가면 안 된다. 인터넷에서 본 시가 기억난다. 제목 <-참외서리하다 잠이 들었다.>“깨어보니 / 원두막에서 이불을 덮고 있었다. / 주인이 안고 왔나보다. / 반 쯤 먹던 참외가 / 머리맡에 있었다.”, 제목 <- 참외서리하다 들켰다.> “주인은 / 하루 종일 일만 시켰다. / 집에 올 때 주인은 / 잘 익은 참외 4개를 주었다. / 아빠두, 엄마두, 동생두 / 참외를 맛있게 먹는다. / 어디서 났는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인터넷카페, http://cafe.daum.net.dujulc) 이런 시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긴다. 적당히 나무라고 먹을 것을 챙겨주는 주인의 마음이 우리네 이웃 어른들의 마음이었다. 요즘은 서리하다 걸리면 밭떼기로 물어줘야 한다고 하니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다. 서리가 아니고 도둑질이 되었다.

‘서리’는 ‘친구들과 여럿이 몰래 훔쳐 먹는 장난’이다. 옛문헌을 보면 “다 자심을 기다려 설고 시자(侍子) 찬물(饌物)을 설어 별실(別室)에 놓아 두어든”<家禮諺解, 인조10년, 1632>이라는 글이 보이고, 또 “추인을 설며(撒芻人”<練兵之南, 광해군4년, 1612> 등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설다’는 ‘설겆다, 걷어치우다’의 뜻이다.(서정범, 새국어어원사전) 이러한 단어에서 ‘설거지’란 말도 유래하였다. 즉 설거지는 ‘그릇을 씻어 제 자리에 두는 일’, ‘비가 올 때 물건을 거두어 들이는 일’등을 일컫는다. 이렇게 ‘급하게 거두어 들이는 일’이 ‘서리’가 되었고, 이 말은 다시 ‘훔치다’의 의미를 담아 전해졌다고 본다. 예를 들면 “밥상을 훔쳐라.”, “방바닥을 훔쳐라.”할 때도 빠르게 치우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음과 같다. ‘서리하다’는 ‘훔치는 것’을 말하지만 장난(놀이)의 의미가 강하다. 주인 역시 놀이의 일종으로 생각해서 혼을 내기는 하지만 위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안아다 원두막에 재워주기도, 잡아서 벌로 종일 일을 시키기도 하지만 갈 때는 보상으로 훔친 것을 주기도 하였다. 정월 대보름은 ‘밥 훔쳐 먹는 날’로 집집마다 부뚜막에 훔쳐갈 밥을 장만해 놓기도 하였다. 그러면 서리해온 밥을 모두 한 곳에 넣고 참기름을 잔뜩 부어 비벼 먹곤 하였다. 가끔은 ‘닭서리’해 오는 녀석도 있어서 백숙으로 만들어 소금 찍어 먹기도 하였다. 과거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아이들의 서리는 눈 감아 주는 것이 상사였다.

한 편 ‘쓰리’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게 들린다. 흔히 쓰리꾼(‘소매치기’의 비표준어)이라는 말로 더 알려져 있다. 시골에서 서울(성남)로 처음 유학(?)갈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서울에 가면 쓰리꾼이 하도 많아서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고 하며 걱정해 주었다. 그래서 책밖에 없는 가방일지라도 앞가슴에 안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쓰리’는 일본어다. ‘소매치기’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그 일본어의 어원이 suri로 우리말 ‘서리’와 같다고 본다. 우리말 ‘서리’는 ‘훔쳐 먹는 장난’인데 비해 일본어 ‘suri(쓰리)’는 ‘훔치는 행위’에 방점을 찍은 단어다. 어원은 같지만 일본사람들은 훔치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다르다. 아마도 우리말이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도둑맞은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 가을에는 마음을 서리당하고 싶다. 가을은 정녕 남자의 계절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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