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북한식 개혁개방의 갖는 의미(4)

제4편. 자본주의적 변화의 시발점 장마당

  • 이도건 시민기자 bandi0413@naver.com
  • 입력 2021.01.26 13:35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출처=인터넷]
[출처=인터넷]

북한, 하면 핵과 같은 큰 이미지가 그 뒤의 소소한 일상들을 모조리 가리고 있다. 보통 북한에 대한 표상을 묻는다면 절대다수가 핵을 떠올릴 것이다. 워낙 핵이라고 하면 그 의미가 막중한데다가 국제적인 관심사여서 그럴 만도 하겠지만 북한을 논하고 이해하는 데서는 제일 큰 방해물이다. 북한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근절해야 할 편견의 근원이다. 핵이나 테러, 미사일 등 북한의 실체를 가리고 있는 큼직한 장막을 제치고 순수 북한의 사회정치상을 본다면 어떨까?

우선 북한의 자본주의적 전환의 시발점이 어디인가를 짚어 보자. 두말 할 것 없이 자본주의화의 시원은 시장의 출현이다. 김일성 시기인 90년대 중엽까지 북한에 존재하던 시장은 전형적인 농민시장, 즉 장마당 형태였다. 당시의 시장은 주로 농민들의 부업생산물을 도시의 소비자들과 연결시켜주어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한편 도시 생활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매 월 1자가 들어간 날마다, 즉 열흘에 한 번씩 장을 열도록 하였다. 사회주의 노동생활체계가 어지간히 유지되던 당시에는 노동자들은 주일 차, 농민들은 열흘에 일차 휴일을 받았었다.

열흘에 한 번 여는 장날이 바로 농민들의 휴식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북한 사회에서 주말휴식이란 개념이 삭막해지고 노동과 휴식의 계선이 아예 없어졌다. 김일성 때 그런대로 유지되던 체계가 김정일 시기는 휴식일은 묻지 말고 쉬라, 하고 말로라도 외쳐졌다면 현재는 밤을 모르는 열정의 인민으로 만들겠다는 불철주야의 혁명성이 고취되고 있다.

이 시기의 농민시장에서는 국가가 제정해준 엄격한 가격기준에 준하여 상적 거래가 진행되었으며 허용되는 시장상품들은 철저히 농촌성을 띤 농민생산품이어야 했다. 자유시장의 맹아였지만 주민들은 많은 애착을 느꼈다. 왜냐하면 항상 국정가격이라는 변동할 수 없는 가격사슬에 매여 살던 지겨움이 단돈 한 푼이라도 흥정하고, 질적, 양적인 선택을 자의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이 단번에 갑갑하던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때 벌써 주민들의 자유로운 상적 속성이 발로되어 무엇이든지 자신의 것을 팔 수도 있고 살 수 도 있으며, 중요하게는 더 한 발 내짚어 거래를 가운데서 중재하면 가치공간을 얻을 수 있다는 상적타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 안에서는 농민시장이, 밖에서는 그때 벌써 암시장이 운영되었다.

주로 통제품이면서도 인기품인 담배, 술, 외화가 위주로 암거래되었다. 날이 감에 암거래가 엄청나게 성행하여 비사회주의라는 시대어가 생겨났고 새로운 단속통제가 적용되었다. 하지만 흐르는 물을 멈출 수는 없다. 단 지연시킬 뿐이다. 여러 제약조건으로 말미암아 북한의 시장은 정말로 많은 우여곡절과 희생 속에 힘들게 발전하여 왔다. 김일성 사망 후 “고난의 행군”은 장마당의 급진적 변화를 가져온 근본 요인이다. 그 누구의 지시나 조직적이고 법적인 조치에 따라 마련된 시장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북한 주민들의 필사적인 생존활동이 활발해진 것이다. 있는 것은 내다 팔고 없는 식량을 비싸게라도 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고 그런 거래 방식이 필요했다.

마비된 사회주의공급체계에 매달려서는 절대로 살아 날 수 없다는 것을 죽음과 직접 씨름하면서 북한 주민들은 뼈아프게 절감하였다. 섯불리 엄두를 못 내던 위법적인 상적 거래에 목을 내대고 뛰어드는 전군중적 용기가 여기서 생겨났다. 이때 북한 정부의 대응은 어떠하였는가? 전국 도처에서 숱한 생명들이 죽어 나가고 거리와 골목마다 꽃제비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녀도 사실상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무맥한 정부였다. 사면초가의 처지에서 폭동마냥 일어나는 주민들의 장사활동을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걸 잘못 건드린다면 민심의 뚝이 졸지에 터지고 말 것이다. 더럭 겁 들기도 한 북한 정부는 잠시 법전을 덮고 일반적인 법의 도수를 무척 낮추었다. 먹고 살기 위한 매 개인의 생존활동이 곧 사회주의를, 정치가들도 어쩌지 못하는 북한이라는 국가를 유지하는 유일한 지탱력이고 지상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북한의 독재자와 추종자들은 모르는 척하고 주민들의 사적인 활동을 수수방관 하였으며 그 추이와 생활력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지방과 지역별로 상설적인 시장을 설립해주는 것으로서 슬쩍 부추기기도 하였다. 일단 시장을 합법적으로 지정해주자 전 사회에 활기가 넘쳤고 점차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국영상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공급체계에 엮여 있던 북한의 사회생활구조가 점차 장마당을 거점으로 변화되었다. 개인들의 상적 활동에 근거한 유기적인 물질생활구조로 단기간에 전환되어 관계가 무척 활성화되었다. 국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하는 정치가들과 경제가들과 학자들이 머리를 싸쥐고 도출해내지 못한 소생방법을 바로 백성들 스스로 고안해 내고 주인이 되어 성장, 발전시켜 직접 덕을 보는 것이다. 참말로 국가란 독재와 그 소수의 통치계급이 아닌 전 국민적인 공동체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북한 시장화의 선각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80년대의 장사 1세대들이다. 그 때로서는 엄두내기 힘든 장사라는 암거래에 벌써 용감히 뛰어들어 시장화의 맛과 덕을 본 극소수의 불씨들이 “고난의 행군” 전역에 시장화의 불을 달아 주었다. 누가 강요하고 추동해서가 아니라 오직 살기 위한 인간의 본성들이 불시에 타올랐고 시장을 거점으로 한 새로운 사회생활방식이 북한 사회에 만연되었다. (제5편. 개방에 대비한 시장의 국가독점화 2월 2일 연재)

저작권자 © 국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