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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마지막 집"

  • 강하나 시민기자 rmawn0903@naver.com
  • 입력 2021.01.08 13:51
  • 수정 2021.01.0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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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집에 얹혀살기 시작한 지 벌써 1년...
한 지붕 아래서 미닫이 문을 사이에 두고 외할머니와 우리는 아랫방에서,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외삼촌네는 윗방에서 살고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식구가 더 늘어나니 착하고 듬직한 며느리라 불리던 둘째 외숙모도 투덜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외숙모 입장에선 우리가 무척 싫었을 것이다.
"어머니. 누이한테 말해서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슴까? 언제까지 살겠담까?"
엄마가 행방 장사를 떠나면 외할머니에게 불만을 토로했고 그 사이에서 우리 세 자매는 눈치 보느라 바빴다. 어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밥을 조금이라도 덜 먹고 집안일을 눈치껏 돕는 거였다.
외할머니는 외숙모의 말에 시어머니로서, 딸의 힘듬을 아는 부모로서 며느리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꾸짖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이 집은 내 집이고 여기 들어와 사는 게 힘들면 당장 나가도 되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며느리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우리 셋을 나란히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에효... 그러게 뭣하러 애들은 많이 낳아서 고생하는 건지... 막내는  왜 태어났냐?"
외할머니는 자신의 딸이 안쓰러울 때마다 엄마의 딸인 막냇동생에게 원망의 화살을 쏘았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어린 막냇동생은 외할머니에겐 사랑스러운 손녀라기보다는 딸을 힘들게 하는 천덕꾸러기였다.

6남매 중 맏이 었지만 고난의 행군이 닥치자 이모와 삼촌들에게 엄마는 남편도 없이 자식만 많이 낳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외가댁에서 얼마나 살지, 어떻게 살지에  대한 문제가 삼촌들과 이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아마 엄마였을 것이다.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곳이라곤 부모와 형제가 있는 고향뿐이었는데 오히려 그곳에서 상처 받는 일들이 더 많았을 테니 말이다.
결국 엄마는 할머니와 의논 끝에 고향인 그곳에서 허름한 집이라도 구해 독립해서 살기로 했고
이 소식을 들은 큰 외숙모가 물류 창고를 지키는 조건으로 두만강과 중국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
방 하나 있는 집을 소개했다.
집이라기보다는 창고에 보관할 물건을 지키는 경비실에 가까웠고 어떡하든 그곳에서 살기 위한 삶의 보따리를 풀었다.
그동안 눈칫밥을 먹으며 마음고생했던 탓에 낡고 좁은 방이었지만, 우리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에 행복해서 엄마에게 물었다.
" 우와~어머니! 너무 좋슴다. 어머니 이제 우리 식구만 사는 검까?"
"그래... 그렇게 좋니?"
"네. 너무 좋슴다. 이제 우리 집에서 잘 살고 싶슴다. 동생들과 여기서 계속 삽시다."
"그래... 북녀야. 네가 이제 엄마 도와줘야 한다."
경비실은 우리가 이름 붙여준 우리 집이 되었고 그렇게 경비실 같은 집이라도 구하고 나니 이제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했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살기 위해 무역하는 사람들의 물건을 보관해주거나 타지에서 중국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숙박을 제공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살길을 찾아야 했고 그때부터  중국에 있는 친척( 조선족)을 찾아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일제 때 헤어지거나 6.25 때 헤어진 부모형제였다.
타지방에서 함경북도의 국경지역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중국에 있는 친척을 찾아 연락을 해야 했고 친척이 나오기까지 머무를 공간이 필요했다. 국경지역에 사는 주민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해야 할까?
국경지역 주민들은 중국 친척을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주고 편의를 제공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때 그곳에서 유행한 말이 있었는데 세관 앞에서 중국 친척이 나오기를 목 빠져라 기다리는 사람들을 왜가리라 불렀다.
그들에게 친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방법은 화교를 통하거나 혹은 중국에 들어가는 중국사람에게 북조선의 국경지역 어디 누구네 집에서 아무개가 기다리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내용을 전화번호와 함께 전달하는 것이었다. 소식이 전달되면 중국에서는 도와주는 사람, 거절하는 사람, 도와주지 못하는 사람, 부담스러워하는 사람 등등 다양했다.
외할머니 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자주 숙박을 했었는데 할머니는 우리 집으로 보내기도 했다.
고생하는 딸을 위한 외할머니의 사랑이었다. 그래야 먹고살 수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왜가리들은 통행증을 발급받고 오는 사람들로 숙박비를 먼저 지급했지만, 가끔은 후불인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중국의 친척이 확실하게 도와줄 수 있다는 조건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독립한 지 한 달이 되어 갈 때쯤 할머니가 원산에서 친척을 만나러 온 사람이라며 우리 집에 숙박시키라고 소개해주었다.
엄마는 그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숙박비를 먼저 줘야 합니다. 며칠 있겠습니까?"
"아... 아마 한 2개월 정도 있을 것 같단 말입니다.
좀 더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일단 그럼 2개월치만 줄 거니까 잘 좀 부탁합니다. 친척 도움받을 수 있게 연결 잘해주시오."
"네. 걱정 마시요. 편하게 지내시오."
어머니는 곧바로 중국에 있는 친척에게 연락하여 우리 집에 아무개가 기다리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원산에서 온 사람들이 친척을 기다리며 우리 집에서 머무는 동안 어머니는 그 손님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고 그들이 원하는 음식은 다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15일이 지났을 때쯤 친척들이 나왔다고 세관에서 연락이 왔다.
세관에 친척을 기다린다는 명부를 미리 작성해 놓으면 세관 앞에서 이름을 호명하곤 했다.
"박 아무개 만나러 흑룡강서 박 아무개가 나왔는데 여기 있습니까?"
이런 말을 듣게 되는 사람은 환호를 지르며 세관 정문 앞까지 달려 나갔다.
"네네! 우리 친척임돠! 어머 왔다!"
중국에서 친척이 나온 날은 숙박 제공을 한 집도 경사의 날이다.
중국 친척들은 조선족이었고 북한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그곳에서 나올 때 함께 먹을 음식까지
넉넉하게 만들어가지고 나왔다.
덕분에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이었고 우리가 가장 많이 먹었던 중국 음식은 월병과 마화 그리고 땅콩이었다.
(마화는 대형 꽈배기이다.)
그 외 쌀이며 옷가지와 돈 그리고 담배까지 가능한 모든 것을 다 갖고 나왔다. 덕분에 우리도 옷가지, 쌀, 콩기름, 밀가루 등등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만남에 기쁜 사람들은 서로 붙잡고 울고 불며 안부를 물었고 삐쩍 말라있는 북한 사람들의 모습에 많이 안쓰러워했다. 그때 중국에서 나온 친척이 울면서 한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동생아. 우리가 만난 건 하나님의 은혜야.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나게 해 주셨어. 하나님~감사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 아니 친척들을 서로 만나게 해 준 건 우린데 그 사람들은 이상하오. 하나님이 도와줬다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웃음이 나와서 혼났소. 하하하!"
이랬던 엄마가 딸을 위해 하나님께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 하하하!
성공적으로 중국 친척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국경지역에 올 때는 빈 몸이었지만 돌아갈 때는 행복과 풍요로움 가득이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행복과 풍요로움만 안고 가는 것은 아니었다. 몇 개월씩 기다려도 중국 친척들의 도움을 못 받고 울며  빚만 지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중국이 눈앞에 보이니 친척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집은 이렇듯 삶의 파도가 출렁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집이  윗동네에서의  마지막 집이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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