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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南韓)에서 만난.. '북한(北韓)식 언어'

북한말을 못하는.. 북녘 인

  • 강하나 시민기자 rmawn0903@naver.com
  • 입력 2021.01.1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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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정착 생활을 하나원이 아닌 최전방 군인관사에서 시작했던 내가 12년 만에 들어간 국정원은 다시 만난 북한이었다. 탈북 후 처음 마주하게 된 고향사람들과의 만남은 기쁨과 반가움보다는 혼란스러움이었다.

당연히 반가울 줄 알았던 고향사람들과의 만남, 당연히 남쪽 말을 할 거라 생각했던 대한민국 국정원, 이 모든 것들이 와르르 무너졌고 북송당한 느낌이었다. 국정원에 들어가니 직원이 종이 한 장을 주며 말했다.

“여기 원주필로(볼펜) 이름 쓰세요!”

통일부

 

원주필도 바로 알아듣지 못해 한동안 망설였다.

“네?”

“여기 볼펜으로 이름 쓰시라고요. 원주필 몰라요?"
직원이 볼펜을 들면서 이야기해서야 볼펜이 원주필인 것이 생각났다. 
갑자기 확 달라진 환경 탓인 걸까? 아니면 북한에서의 삶이 나에겐 트라우마로 남은 것일까?

극심한 두통과 복통으로 인해 결국 국정원 내 병원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게 되었다.

남자 선생님이 물었다.
"어디가 불편합니까?"
"네. 머리가 아프고 배도 아프고."

선생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결혼은 했습니까?"
"네."

"아이는 밑으로 낳았습니까?"

선생님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고 내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네??? 선생님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선생님도 나의 질문에 살짝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남한식으로 다시 물었다.
"아~자연 분만하셨어요? 제왕절개하셨어요?"

남한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질문을 한 선생님을 이해해야 되는 상황임에도 나는 순간 그 질문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상당히 무례한 질문이니 말이다.
하지만 국정원에 있는 탈북민들과 북한 주민들에겐 낯설거나 무례한 말이 아니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 오면 가장 먼저 가는 곳이 국정원이니 원활한 소통을 위해 국정원의 모든 관계자들이 북쪽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선 남쪽 말을 사용하는 내가 특이한 거였고 남한 사람이 북한에 가면 일어날 상황을 먼저 겪은 셈이었다.

언어로 인해 어이없는 상황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함께 지내게 될 사람들과 인사도 해야 하는데 남쪽 말과 외래어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북쪽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저기요! 매트리스(매트리스는 뭐라고 하지?) 지퍼가 (지퍼는 뭐라고 했었지?) 망가졌는데 다른 거로 바꿔줄 수 있나요?”
“네? 뭐라고 했슴까?마다라스 말임까?"
'마다라스는 뭐지?'
"그거 깔고 자는 거요."
"아~깔개 그럼까? 마다라스를 말하는 거네."
“지퍼... 그거 있잖아요 지퍼...”

북한에 있을 때 내가 알던 지퍼를 쟈크(작꾸)라고 불렀지만 그 단어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북한 사람인 내가 북한말을 알아듣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같은 북한 사람이기는 하나 한국에 온 지 며칠,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란 쉽지 않았다. 북쪽 말이 아닌 남쪽 말만 하는 나를 보며 들으란 듯이 대놓고 수군거렸다. 

“야! 저 여자 뭐라니?”
“모르겠다. 북한 여자 아닌가?”
“북한 사람이니까 여기 왔겠지. 그런데 왜 북한 말 안 하고 한국말한다니?
잘한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익숙하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고향사람들의 말과 행동, 이해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러쿵저러쿵하는 말들보다 더 힘든 것은 이질감으로 인해 생겨나는 답답함이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얼마나 남한스러워졌는지를...

결국 손짓 발짓해가면서 이야기하고 나서야 필요한 물건을 가져올 수 있었다.겨우 하루가 되었을 뿐인데 그로 인해 지치고 피곤한 나의 머릿속에는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북한 여자와 사는 남한 남편의 입장이 되어 문화의 차이를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잠시 잠깐인데도 이렇게 답답한데 그 오랜 세월 나와 함께 살아온 남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라는 생각에 남편에게 고마운 하루였고 빨리 보고 싶었다.

북한을 떠난 후 중국에서든 한국에서든 나는 단 한 번도 북한 사람들과 어울려 본 적이 없었다. 중국에서도 중국사람들과만, 남한에서도 남한 사람들과만 생활했고 남편도 남한 사람이다 보니 조금 더 빠르게 남한스럽게 정착했다. 그랬던 내가 북한 사람들만 있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 것이다.

북쪽 말보다는 남쪽 말에 더 익숙해진 혼란스러운 이곳에서 얼마나 있게 될지 겁이 났고 스트레스가 심해져 일주일 사이 몸무게가 4킬로나 빠졌다. 이런 나에게 심신의 안정을 찾게 해 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아침저녁으로 국정원에서 들려주던 애국가였다.

북한 같은 국정원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임을 알려주던 애국가는 우황청심환이었다. 애국가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고 애국가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조사관을 만나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남한에서 만난 북한! 국정원에서의 시간이 힘들긴 했지만, 나에겐 정말 소중한 경험이 되었고 통일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통일이 될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 꼭 돼야 한다?... 등등 통일에 관심 있던 없던 탈북민들이 남한 사람들에게 이미 많은 것을 보여주며 알리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북한과 통일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통일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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