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국가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 유자효 스페셜 칼럼 webmaster@kukmini.com
  • 입력 2021.04.02 15:07
  • 수정 2021.04.02 16:51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자효 논설위원
유자효 논설위원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김종삼 시인의 ‘민간인’입니다. 남북이 분단되자 북에서 남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들을 안내해주고 돈을 받는 브로커도 생겼습니다. 한 무리의 민간인이 배를 타고 서해를 내려옵니다. 혹시 북한 경비병에게 들킬세라 모두들 숨죽인 채 사공이 조심조심 노를 젓는데 철없는 아기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순간적으로 엄마는 아기를 바다에 넣어버립니다. 여러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지요.

 아, 그러나 그 엄마의 삶도 그날 밤 아기와 함께 사실상 바다속으로 들어가버렸을 것입니다. 시인이 그 일을 시로 쓴 것은 20여 년 뒤였지만, 그래서 그때까지도 그 슬픔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 뒤 다시 50년, 남한의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북한 해역에서 북한군에게 사살됐습니다. 북한군은 시신마저 바다에서 불살라 버렸습니다. 사고가 일어나자 군경은 월북 정황이 짙다고 발표했습니다. 바다에서 조난자를 발견하면 일단 건져내는 것이 상식인데 왜 북측은 귀순하려는 사람을 여섯 시간씩이나 차디찬 바다에 버려두었다가 사살하고 불태우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것일까요?

 숨진 공무원의 고등학생 아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쓴 편지가 많은 이들을 울렸습니다. 아들은 아빠가 월북하려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며, “이 고통의 주인공이 대통령님의 자녀나 손자라고 해도 지금처럼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빠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할 때 이 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문 대통령은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내가 직접 챙기겠다”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공무원의 형은 “원론적 답변에 실망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해경 조사에서 “월북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 당국이 이토록 잔인한 결정을 한 이유에 대해 정치인 장기표 씨는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에 이어 남한과 대화할 뜻이 없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사건 이후에도 종전선언을 계속 주장했으며,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안보협의회에서는 우리 정부의 조기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추진 등에 대한 이견이 노출됐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북한의 인명 경시가 어느 정도인가를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북이 동족을 핵으로 치겠느냐”에 대한 감상적 물음에, 북은 표류한 남한 사람을 잔인하게 사살하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실종 당일과 수색 당시에도 남과 북 사이에는 국제공동상선망을 통한 통신이 있었습니다. 북에 구조 협조 요청을 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허송한 것입니다. 유엔은 북한에 책임자 문책과 유족에 대한 피해 배상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이 문제에 대한 문 대통령의 답은 없었다고 그 공무원의 아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에게 국가는 무엇일까요?

 북한자유연합의 수잰 솔티 대표의 “대통령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란 기고문이 다시금 우리의 가슴을 칩니다. 솔티 대표는 “김정은이 코로나 공포 때문에 국경을 닫아걸고 중국이 강제 북송하고 싶어하는 탈북민들을 받지 않으려 하는 이 시기야말로 천금 같은 기회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중국 수용 시설에 갇혀 있던 젊고 아름다운 북한 여성 두 명이 그들이 요청했던 한국이 아닌 그들을 학대한 자들의 손아귀에 던져졌으며, 수백 명의 다른 이들에게도 등을 돌렸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이 이들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면 이들은 처형당할 것”이라며 “제발 행동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TV에서 중계하듯이 본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저는 상상하기 힘든 독재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밤중에 수도 시민들을 동원해서 거대한 무력 쇼를 펼치는 것이 현재 북한 외에 가능한 나라가 또 있을까요? 신형 대륙 간 탄도미사일(ICBM) 등을 자랑하듯 보여주면서 “사랑하는 남녘의 동포” 운운하는 것은 또 얼마나 이율배반적입니까?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합니다. 북한은 시대착오적인 권력 세습 3대에 접어들면서 피할 수 없는 독선과 공포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외부 세계를 경험한 북한인들이 그들의 장래를 우려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2018년 11월, 임지인 이탈리아 로마에서 잠적했던 조성길 북한 대사대리가 한국에 정착한 것도 이와 같은 현상의 한 표현으로 보여집니다. 태영호 의원의 말처럼 ”한국은 기회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서해안 공무원 피살 사건이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과연 대한민국은 나를 구해줄까 하는 질문입니다. 어떤 핑계를 대며 모든 책임을 슬며시 내게 떠넘기곤 빠지려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또는 이런저런 정치 공방으로 나의 사후 명예마저 더럽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입니다.

 이번 사건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국민에게 던졌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민에는 북한 주민들까지 포함됩니다. 현재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과 집권 세력은 국민에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 대답을 듣기 전에는 공무원이 숨져간 서해의 수심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저작권자 © 국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