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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까치(?) 한 개피(?), 한 개비

  • 최태호 스페셜 칼럼 webmaster@kukmini.com
  • 입력 2021.04.1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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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 중부대 한국어 교수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 교수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시절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어른처럼 보이고 싶어서 화장도 하고 술도 마셔 보고, 담배도 피워 본다. 필자도 늦게 담배를 배웠다. 스물여덟 살에 처음 피우기 시작해서 삼십 대 중반까지 끽연을 즐기다가 뭔가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해서 단호하게 끊어 버렸다. 한 달 정도는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괜히 짜증을 내고 늘 화난 사람처럼 투정을 부렸다. 한 번 입에 대면 끊기 어려운 것이 담배인데 왜 젊은이들은 담배를 피우려고 노력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금연한 것이 삼십 년을 넘었으니 폐는 다 청소됐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철없던 시절에 교무실에서 마구 뿜어댔던 담배 연기로 고통을 당했을 동료 교사들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한 권리인 줄 알고 한겨울에 난롯가에 앉아서 끽연을 즐기곤 했다.

학창시절에는 돈이 없었던 관계로 친구들이 ‘까치담배(가치담배)’를 사서 피웠던 것을 기억한다. 길거리 손수레에 잡화를 싣고 다니던 사람들이 담배를 ‘한 개비’씩 뽑아서 푼돈을 받고 파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좀 놀아본 애들은 다 그런 경험을 했을 것으로 본다. ‘까치담배’를 사서 피우던 녀석들이 이제는 모두 늙어서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지금은 오히려 담배 피는 녀석들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가 되었다. 필자의 경험으로 그들도 금연의 아픔을 꽤 겪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담배를 세는 단위는 ‘개비’라고 한다. 사전에는 “개비 : 가늘게 쪼갠 나무토막이나 기름한 토막의 낱개, 가늘고 짤막하게 쪼갠 토막을 세는 단위”라고 나타나 있다. 그런데 우리 친구들은 개비라고 하면 “있던 것을 갈아내고 다시 장만함.”을 뜻하는 ‘개비(改備)’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좀 좋은 걸로 개비했어.”라고 할 때 쓰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담배 한 가치만 피웠으면 원이 없겠네.”라고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혹은 “야! 담배 한 개피만 줄래?”라고 하는 표현도 자주 듣는다. 구어와 문어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경우도 드믈다. 담배나 성냥같이 가늘고 긴 토막을 세는 단위는 ‘개비’가 표준어이다. 세상에는 널리 알려진 것이 표준어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잘 쓰지 않던 단어가 표준어인 경우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표준어나 표준발음으로 사용해도록 노력해야 한다.

담배 이야기가 나왔으니 계속해서 오늘은 담배 이야기로 마무리해야겠다. 예전에 담배를 피던 시절에는 알았는데, 지금은 잊은 단어가 있다. ‘담배 한 보루’라는 말이다. 한 보루는 ‘담배 열 갑’을 이르는 말이다. 즉 담배를 묶어서 세는 단위다. 이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담배는 ‘타바코’라는 포루투갈어에서 유래했고, 보루는 원래 ‘board보드’라는 영어가 기원이 됐다. 이 보드라는 말은 ‘판자나 마분지’를 일컫는 말인데, 담배 열 갑을 딱딱한 마분지로 말아서 그것을 케이스 삼아 그 속에 담아서 팔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원래는 ‘담배 한 보드’라고 했다. 그것이 일본을 거쳐 오면서 발음의 변이가 생기게 되었다.(이재운 외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우리말 잡학사전>) 담배라는 말은 포루투칼에서 왔고, 보루는 미국에서 시작하여 일본을 거쳐 왔다. 오다 보니 피곤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발음에 변이가 생겼다. ‘보드’보다는 ‘보루’가 발음하기 편했던 것이다. 그래서 담배를 묶어서 파는 단위가 한국에서 새롭게 탄생했다. 사전에는 일본어라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영어가 객지에 나와서 고생하다 보니 국적을 잃은 것이다. 얼굴은 서양인인데 한국말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운 단어다.

보루를 사전에서 예문 검색을 해 보면 ‘보루(堡壘)’에 관한 것만 잔뜩 나온다. “담배 한 보루 사 오너라.”하던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아이들을 시킬 수도 없거니와 담뱃값이 하도 인상을 거듭해서 한 보루 사려면 기둥을 하나 뽑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보루(堡壘)’라는 말은 “그에게는 그이 가정이 인생의 마지막 보루였다.”, “적의 내침에 대비하여 보루를 튼튼히 쌓다.”와 같이 나와 있다. 이제는 옛말이 되어 버린 ‘담배 한 보루’는 그 의미를 잃어 역사(사전)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것을 언어의 역사성이라고 한다. 언중들이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지게 마련이다. 사라질 때 사라지더라도 그 의미는 바로 알고 넘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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