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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초석(礎石) ‘4.19정신’을 되새기자

  • 장석영 스페셜 칼럼 webmaster@kukmini.com
  • 입력 2021.04.14 01:25
  • 수정 2021.04.14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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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 박사
장석영 박사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의 사실상 정점이라 할 수 있는 ‘4.19 혁명’이 2021년 4월 19일로 61주년이 됐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맞은 것이다. 혁명대열의 한 모퉁이에 참가했던 필자로서는 오늘의 혼돈시대를 살면서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일찍이 영국의 한 신문은 61년 전 그날의 한국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적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혹평 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속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였고, 북한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남한 내 남로당은 총선거를 방해하고 파업을 선동해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는 ‘생지옥 같은 나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강인한 끈기로 피와 땀을 흘리며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워냈다. ‘4.19 혁명’으로 ‘민주화’를 이루고 한 명의 걸출한 지도자를 배출해 ‘산업화’를 이룩하면서 마침내 세계인들이 놀라고 부러워하는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세계 제2차 대전 후 독립한 100여개 신생국가 가운데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유일한 국가가 됐던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한민족이 아닐 수 없다.

 그 민주화를 이루는 첫 걸음을 떼게 한 것이 1960년 4월 19일에 일어난 ‘4.19 민주 혁명’이다.  4.19 혁명은 무엇보다 우리민족의 주체적 역량과 민주적 자각에서 우러난 국민주권의 승리였다. 뿐만 아니라 이 혁명은 불의(不義)와 타협해온 기성세대에 대해 젊은 세대가 일대 경종(警鐘)을 울린 것이었다. 아울러 새 시대를 향한 젊은 지식인들의 사명감을 고취시킨 역사적인 의식개혁운동(意識改革運動)이라 할 수 있다.

 4.19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2월부터 지방에서는 산발적이었지만 많은 고교생들이 정부의 부정선거 획책에 대해 경고성 시위를 한 차례씩 한 바가 있었다. 대구와 대전 그리고 마산의 고교생들이 집단적인 시위를 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3월15일 부정선거가 치러진 뒤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학생의 시신이 바다에서 올라왔고, 드디어 3월 17일 서울에서도 성남고교생 4백50여명이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했다.

 ‘3.17 서울민주 의거’에 참여한 성남고교생들은 시위 도중에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가 깨지는 등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고, 앞장섰던 100여 명의 학생들은 시위 현장에서 붙잡혀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기도 했다. 성남고교생들의 시위와 연행 기사는 다음날인 3월 18일 조간신문에서 대서특필했다. 그 뒤에도 전국 곳곳에서 소규모 시위가 잇따랐다. 그리고 드디어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아침 학교에서 출발해 광화문으로 진출하는 첫 대학생 시위를 벌였다.

 ‘3.17 서울민주의거’는 3.15부정선거에 대한 지방 고교생들의 항거를 단숨에 중앙무대로 끌어올려 폭발적인 범(凡)국민반정부 시위로 확산시킨 도화선(導火線)이 된 셈이다. 한편 고려대 학생들은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해 연좌시위를 벌인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도중에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다음날인 4월 19일 고려대 학생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길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자 서울시내 고교생들은 물론 각 대학의 학생들이 일제히 광화문 앞으로 나와 차도와 인도를 꽉 메운 채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 책임자를 처벌 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미 서울에서 처음으로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에 연행돼 ‘다시는 시위를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고 풀려났던 성남고교생들도 4월 19일 아침 다시 광화문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해 4.19시위에 동참했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학생회장 박효성 학우는 언제 준비했는지 도화지에 손으로 그려 만든 태극기 수십 장을 들고 나와 함께한 동급생들에게 나눠주고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하는 시위대열에 앞장서서 시위대들에게 의협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은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주동이 돼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막걸리와 고무신 선거’도 모자라 ‘투표함 바꿔치기’ ‘대리투표’ ‘올빼미 투표’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3.15 선거’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下野)와 이기붕 가족의 자살과 함께 우리 역사에서 ‘부정선거’라는 크나큰 오점(汚點)을 남기고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뿌린 피로 얻어낸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4.19 혁명 정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試行錯誤)를 겪었지만, 끝내 자랑스러운 자유대한민국이 이 땅에 단단히 뿌리내리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행이도 오늘 우리 국내 상황이 민주화와 산업화에 역행(逆行)하는 정치경제상황이어서 보기에 따라서는 바로 61년 전 4.19 전야(前夜)와 크게 다르지 않다보니 민주화의 초석(礎石)을 놓은 ‘4.19 혁명정신’을 다시금 되새겨야겠다는 각오를 갖게 한다. 더욱이 매년 이맘때면 동기생들과 ‘3.17 서울민주의거’와 ‘4.19혁명’ 기념식에 참가해서 앞서 간 분들의 명복을 빌어 왔으나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61년 전 그날 우리는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 거리로 뛰쳐나가 외쳤다. 최루가스가 하늘을 뒤덮고 경찰봉에 얻어터지면서 경무대로 향할 때 총알이 귓전을 스치고 옆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걸어가던 이름 모를 청년이 쓰러질 때도 ‘민주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렇게 열망하던 민주화가 어렵게 이룩됐으나 어느새 독재화의 길을 걷고 있다니 가슴이 메어진다. 그날의 외침이 다시 오늘에 부활하여 이 혼돈의 시대를 멈추게 하여 주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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