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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을 모르는 친중 종북 망령들

  • 이향숙 스페셜 칼럼 webmaster@kukmini.com
  • 입력 2021.06.01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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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숙 국민투데이 논설위원
이향숙 국민투데이 논설위원

최근 국회에서 국적법 개정안을 발의, 그 내용이 논란이 크다. 내용은 한국과 유대가 있는 나라의 영주권자가 국내에서 자녀 출생 시 그 자녀, 또는 6세 이하의 자녀는 신고만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7세 이상은 5년 이상 거주하면 신고만으로 국적을 준다는 것이다. 영주권자는 자기 모국과 한국 국적으로 이중국적을 얻을 수 있다. 현재는 까다로운 절차와 면접을 거쳐서 통과해야만 귀화하고 국적을 얻는다.

  이게 통과할 경우 가장 혜택을 볼 사람은 국내 체류 외국인의 95%인 중국인과 화교이다. 이 법안에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 청원도 이어지고 있다. 친중국 정책이 도를 넘는다는 여론이다. 왜 갑자기 이 법을 발의했는지, 내년 대선에서 중국인 투표권자를 늘리려는 속셈이라고 보는 의혹도 있다.  

 북한에는 4조4천억을 들여서 공항을 건설하고, 역시 북한에 4조가 드는 원자력 발전소도 건설할 계획이라고 한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군인 중공군 여럿과 잠시 이웃에 살았던,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6.25가 생각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들이 남침해 전쟁이 나고, 아버지는 예비군인 국민병으로 끌려 전쟁터로 갔고, 다섯 살인 나와, 두 살 여동생, 20대인 엄마와 세 모녀는 피란길에 올랐다.  

  세 식구가 당장 입을 옷과 돈 몇 푼 만 가지고 차도 없이 엄마는 머리에 옷 보따리를 이고 동생은 업고, 내손을 잡고 집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한강 대교는 끊어지고 강가의 수백 명 피란민 속에서 몇 시간 동안 소리쳐 뱃사공을 부르며 기다리다 겨우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다 터지면서 그렇게 오산비행장 근처로 가서 방을 구하는데, 피란민이 넘치니 방이 부족해 작은 방을 세 가구가 공동 월세로 들었다.

  8식구가 한방에서 쪼그리고 지내자니 아이들만 누워 자고 어른들은 벽에 기대앉아 새우잠을 잤다. 세 개의 밥상이 차려지면 옆의 남의 밥상 반찬을 보며 초라한 우리 반찬이 서글펐었다.

아군은 낙동강까지 밀려 고전하고 국민들 삶은 이처럼 피폐했다.

  그 후 유엔군의 참전으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아군이 평양까지 진출하자 우리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피란 안 간 이웃이 다 가져갔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중공군 지원으로 인민군들이 또 내려와서 피란을 다시 용인으로 갔다. 1. 4 후퇴다.

 이번에는 16살 큰집 사촌언니가 합세했다. 큰집에는 일곱 식구였는데 처음에 우리가 세 식구만 피란 간 걸 알고 제일 큰 언니를 우리 피란길에 끼운 것 같다. 그렇게 용인 피난살이가 시작됐고 나는 이웃 또래들과 친구가 되어 산이나 들에서 나물을 뜯었다. 그리고 온통 푸른 색 나물죽이 밥상에 올랐다. 용인에서도 작은방 하나를 두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이웃집들 방 몇 개에 중공군 수십 명이 숨어서 기거했다. 그들은 아주 두껍게 솜을 넣은 군복과 코트를 입었다. 우리 국군 군복보다 두껍고, 요즘 겨울 패딩 코트보다 두꺼웠다. 어마무시하게 몸집이 컸다고 기억된다.

 척박한 일상보다 또 다른 큰일이 매일 있었다. 중공군들 때문이다. 밤이면 중공군과 인민군을 향한 아군들의 공습이 계속됐다. 사이렌이 울리면 중공군들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벤지, 벤지(비행기, 비행기)”라고 소리치며 숨으라고 했다. 사실은 자기들만 숨으면 되겠지만 섞여서 한 동네 사니까 함께 피해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매일 밤을 지하 방공호 속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중공군과 공생공사 운명이었다.

  낮에는 공습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낮에는 또 낮대로 공포가 있었다. 젊은 여자들을 중공군이 납치해서 성폭행을 일삼았다. 나 같은 어린애나 나이든 아줌마들은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처녀들과 젊은 엄마들은 고심했다. 사촌언니는 나를 낮이면 업고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얼굴을 시커멓게 칠하고 시골 아낙네로 분장했다.

  그렇게 1년 이상 용인 살면서 나름대로 무탈하게 지내고 전쟁이 끝나가고 있었다. 중공군들은 전쟁에 패하자 퇴각했는데 동네 집에서 약탈한 여러 개의 큰 가마니 솥에서 쌀로 누룽지를 잔뜩 만들어 갔고, 소도 여러 마리 빼앗아 몰고 갔다. 소는 잡아먹을 목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민간인을 절대로 죽이지 않은 것이다.

 사망자 1백50만 명, 부상자 3백만 명, 이산가족 1천만 명, 말로 다할 수 없는 건물과 도로 등 재산 손실을 낸 6. 25가 올해로 71주년이다. 그 악몽의 세월은 당시 피란민들에겐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이 참담한 삶을 가져다 준 전쟁, 그 전쟁을 일으킨 북한과 중국을 좋아하고 도와주는 종북 친중으로 가고 있으니 안타깝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들이 북한을 혐오하는 나이든 세대를 무조건 보수라고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전쟁의 폐허에서 참화를 이기고 고진감래, 오늘날 경제 대국으로 만든 것은 지금의 2030세대도, 4050 세대도 아니다. 그들이 폄하하는 보수 세대들이다.

 부모들이 겪어온 참담한 전쟁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막연히 사회주의를 동경하고 추종하는 종북 친북의 허황한 망령들을 버리고 진실을 바로 알기를 바란다. 진보 사상으로 북한과 중국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만약 북한과 중국으로 이주해서 평생 살라면 행복하게 살다 죽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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