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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이 덮친 필리핀(?)

  • 최태호 스페셜 칼럼 webmaster@kukmini.com
  • 입력 2021.06.14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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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 중부대 한국어 교수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 교수

2021년 6월 13일 조간신문에 실려 있는 기사의 제목이다. 유명 방송사의 뉴스 자막에도 이와 같이 쓰여져 있다. 필자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똥이 필리핀을 덮쳤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을 읽어 보아도 “변이 덮친 필리핀…”이었다. 기사의 내용인 즉 “변이 바이러스가 필리핀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말이었다. 한국어 의미론을 지도하면서 언어의 자의성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해 왔다. 언어는 자의성이 있어서 말하는 사람 따로, 듣는 사람 따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우리 커피 한 잔 할까?” 하고 물으면, 사람에 따라 ‘아메리카노’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또 어떤 이는 ‘커피믹스’(흔히 양촌리 커피라고도 한다. 전원일기에나 나오는 오래 된 다방커피 형식의 ‘믹스한 커피’라는 뜻이다.)를 생각하기도 한다. 듣는 사람은 자기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마련이다. 언어라는 것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뜻이다. 늘 변하면서 사람에 따라 다르게 작용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옛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던 것이다.

우리말은 모음을 조금 변화시켜 비슷하면서 다른 느낌을 주는 단어도 많다. ‘낡다’와 ‘늙다’를 보면 세월이 오래 되면 ‘낡았다’고 하고, 사람도 오래 되면 ‘늙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남다’와 ‘넘다’도 모음만 바꿔서 의미의 변화를 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조사를 넣어 문장의 성격을 바꾸기도 하고, 어미를 바꾸어 무한한 의미를 생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먹다’라는 단어가 있을 때, ‘먹다, 먹고, 먹지, 먹어서, 먹으니, 먹으니까, 먹으므로 등등’의 예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각각의 어미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조사에 따른 의미의 변화도 있다. 외국인들이 참으로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역시 예를 들어 보자. “태호는 머리가 좋다.”라는 문장을 기본으로 두고 몇 가지 보조사로 바꾸어 보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자. “태호는 머리는 좋아.”, “태호는 머리만 좋아.”, “태호는 머리도 좋아.”라는 문장들을 비교해 보면 조사가 문장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머리는 좋아”라고 하면 다른 것은 나쁠 수도 있다. 성질이 더럽다든가, 키가 지나치게 땅과 가깝다든가 등과 같이 바람직하지 않은 내용이 뒤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다른 문장들도 마찬가지로 ‘보조사’에 따라 의미가 엄청나게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 글(훈민정음)은 원래 띄어쓰기도 하지 않았다. 훈민정음 어제 서문만 보더라도 띄어쓰기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문장에서 조사만 윗말에 붙여 쓰고 나머지는 단어마다 띄어 쓰도록 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서양의 선교사가 한국어를 배울 적에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몰라서 만든 것인데, 사용하다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학자들이 국문법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훈민정음은 원래 한자와 마찬가지로 다 붙여 쓰고 읽는 사람이 알아서 끊어 읽는 우리글이었는데, 1877년 영국인 목사 존 로스(John Ross)가 쓴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궁금한 우리말> 세종대왕도 몰랐던 한글 띄어쓰기의 시작은?|네이버 블로그 참조>)에서 한국말을 영어식으로 띄어 쓴 것이 시작이었다. 한글에 본격적인 띄어쓰기가 도입된 것은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을 통해서다. 독립신문은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가 주창한 한글 띄어쓰기 도입을 받아들여 적용하고, 본격적인 띄어쓰기 보급에 앞장섰다. 이후 한글 띄어쓰기는 조선어학회가 1933년 띄어쓰기를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반영하며 보편화하였다.(위의 블로그 참조)

신문이나 방송은 헤드라인을 잘 잡아야 독자들이 읽는다. 그래서 짧게 특징을 표현하다 보니 ‘변이 덮친 필리핀’이라고 해서 마치 필리핀이 똥비(?)가 내린 것처럼 표기하였으나, 이런 경우는 조사를 사용하든지 한자어를 괄호 속에라도 사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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