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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와 에어컨(air-conditioner)

  • 최태호 스페셜 칼럼 webmaster@kukmini.com
  • 입력 2021.07.26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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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 중부대 한국어 교수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 교수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덥다. 오늘은 매미란 놈의 심술 때문에 새벽 5시 반에 기상했다. 열대야로 인해 거의 밤잠을 설쳤는데 이 철없는 매미가 결국 단잠을 깨우고 말았다. 그냥 일어나 주변 공원에 가서 ‘만 보 걷기’로 하루를 시작했다. 더워서 육천 보밖에 못 걷고 들어왔지만 찬물로 샤워하고 나니 개운하기는 하다. 혈압도 130 정도로 안정되고, 당뇨 수치도 108이니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매미 덕분(?)에 일찍 일어나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졸릴 것같은 예감이 든다. 쥘부채(접었다 폈다 하게 만든 부채)를 펴서 힘껏 흔들면 시원하기는 하지만 금방 또 더워진다. 에어컨을 틀기에는 이르고, 선풍기 바람은 싫고 할 수 없이 또 부채를 흔들어 댈 수밖에……

부채는 “손으로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을 말한다. 대오리로 살을 하고 종이나 헝겊 따위를 발라서 자루를 붙여 만든다. 태극선, 미선, 합죽선, 부들부채, 까치선 등이 있다. 이 부채라는 말은 신라시대부터 써 왔던 말이다. 송나라 사람이 쓴 <계림유사>(1103)라는 책에 보면 ‘孛采’라는 것이 나오는데, 우리말로 읽으면 ‘패채’나 ‘발채’가 될 것이나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우리의 ‘부채’와 발음이 비슷할 것이다. 이 <계림유사>라는 책은 우리말(신라어)을 중국어(한자의 음)로 표기한 것이니, 부채로 보아 무방하다. 한 예로 아들을 ‘丫怛(아달)’이라고 표기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예전의 부채는 깃털로 만들었다. 그래서 한자로도 부채 扇(선) 자에 깃털 羽(우) 자가 들어가 있다. 15세기에는 ‘부채’와 ‘부체’가 같이 쓰였다. 서정범(<새국어어원사전>)은 ‘부채’는 ‘부’와 ‘채’의 합성어로 보았다. ‘부’는 ‘불’의 말음(ㄹ)탈락형으로 고어에서 바람을 뜻하고, ‘불다(吹)’의 명사형으로 보았다. 그리고 ‘채’는 명사로서 파리채, 골프채, 의 ‘채’와 같이 도구를 이르는 말이라고 보았다. 한편 조항범(<우리말 어원이야기>)은 동사 어간 ‘붗-(부치다)’에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 ‘애’가 결합된 파생어로 보기도 하지만 15세기 표기에 ‘붗게(당시표기로는 붓게)’로 나타나야 정상인데,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의심스럽다면서 또 다른 설을 주장하였다. 즉 동사의 어간 ‘붗-(부치다)’과 명사 ‘채(鞭)’가 결합된 합성어로 보기도 하였다. 필자가 보기에는 ‘바람을 일으키는 채’라는 의미로 본다면 ‘붗 + 채’에서 말음(ㅊ)이 탈락한 현상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한동안은 ‘부채’와 ‘부체’가 함께 쓰이다가 20세기 초 <조선어사전>(1920)이 편찬되면서 ‘부채’가 표준어로 선정되었다.(조항범, <위의 책>)

한편 ‘에어컨’은 콩글리시(konglish)의 대표적인 것이다. ‘피이팅’이나 ‘런닝머신’ 등과 같이 본토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영어도 아닌 것 같은 영어다. 올여름도 엄청나게 더워서 전력 수요가 역대 최고치를 넘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필자가 볼 때도 그렇다. 실내는 어디를 가든지 항상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와서 백화점이나 서점에 가서 서성이는 것도 피서의 한 방법이다. 필자도 어제 대형 서점에 가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라는 책을 찾으면서 일부러 이곳저곳 다니며 필요한 책이 더 없나 두리번거렸다.

미국에서는 ‘fighting’이라고 하면 ‘싸우는’이라는 의미기 때문에 혼자서 독립적으로 쓰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뭔가 힘을 내자고 할 때 “파이팅!”이라고 외치곤 한다. 요즘은 외국인들도 이것을 따라 한다고 하니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역시 국력이 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런닝머신’도 ‘기계처럼 뛰는 인간’을 뜻한다. 육백만 불(弗=달러)의 사나이처럼 달리는 사람을 말하는데, 우리는 뜀뛰기 틀을 이렇게 부른다. ‘에어컨’ 역시 ‘Air Conditioner’라고 해야 바른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리모콘(remocon = remote control)’처럼 마구 줄여서 표기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현재 에어컨은 “실내 공기의 온도 및 습도 따위를 조절하는 기계 장치”라고 등재되어 있다. 비표준어로는 ‘에어콘’이라고 나타나 있으니 완전히 외래어로 굳어진 형태라고 하겠다. 콩글리시가 표준어가 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줄여서 표기하는 것이 대세임은 인정하지만 뜻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줄이다 보면 다시 주석을 달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지나치게 긴 것이 아니라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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