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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의 광복을 꿈꾸며

  • 유자효 스페셜 칼럼 webmaster@kukmini.com
  • 입력 2021.08.1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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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 논설위원
유자효 논설위원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와싱턴에서 해내외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디서든지 내 말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내가 말하는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파하시오.”

 이는 1942년 8월 29일, 이승만 박사가 미국의 소리(VOA)를 통해 했던 최초의 한국어 방송입니다. 이 박사는 이 방송을 통해 “왜적이 양양 대득하여 온 세상이 다 저희 것인 줄 알지만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왕 히로이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이라며 “분투하라! 싸와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라는 말로 끝맺었습니다.

 태평양을 건너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들려오던 그  방송은 단파 방송을 몰래 듣던 경성방송국 조선인 방송인들의 귓전을 울렸습니다. 그 얘기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해지고, 그 소식은 독립운동의 생명수였습니다. 이 일이 일경에 탄로나면서 방송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50명이 끌려가 심한 고초를 받고 6명이 옥중에서 숨졌으며 75명이 실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랬던 이승만이 6·25 전쟁 발발 이틀 뒤인 27일 새벽 2시에 경무대를 빠져나와 대전으로 달아나 한 방송 내용은 이러합니다.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북한군이 이미 서울에 진입한 상태에서 내보낸 이 방송으로 대통령의 말을 믿고 남아 있던 서울시민들은 28일 국군의 한강 인도교 폭파로 퇴로마저 차단당했습니다. 배가 기울고 바닷물이 차오르는데도 승객에게는 “선실에 가만히 있으라”고 선내방송을 하고 자신은 팬티 바람으로 도망친 세월호 선장을 연상시킵니다.

 3개월 후 서울이 수복되자 많은 시민들은 자신을 버리고 달아난 정부로부터 ‘부역자’란 이름으로 처형당했습니다. 같은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승만의 도덕성과 신뢰는 이때부터 무너져내리기 시작해, 그후 중공군의 참전으로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자 시민들은 정부가 뭐라고 하든말든 앞장서 피난길에 올라 적들은 텅 빈 서울에 입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방송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무너진 이승만의 도덕성은 3·15 부정선거로 이어져 이에 항거하는 마산 의거를 최초로 보도한 것은 민영 라디오 부산문화방송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통치 기간에도 민영 TBC와 DBS, CBS의 보도는 국영 KBS와 결이 달랐습니다. 신군부에 의해 단행된 언론 통폐합으로 방송은 KBS와 MBC 양대 공영 체제로 전환됐다가 노태우 정부 때 민영 SBS가 설립됩니다. 이후 이명박 정부 때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케이블 종합 편성 채널들과 뉴스 채널들이 방송을 시작하고 본격적인 다채널 시대로 진입했습니다.

 

 한국 방송의 시스템은 변화를 거듭해왔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집권 세력의 공영방송 장악 시도였습니다. 방송의 공영성이 중요한 것은 공공재인 전파를 사용하는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권의 방송 장악 시도를 끝낼 때가 되었습니다. 국영 KBS의 일방적 보도가 이승만 대통령을, 박정희 대통령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 진실을 보도하지 않았던 공영방송사들은 5·18 때 광주 사옥이 불탔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설립을 허가한 종합편성채널들과 뉴스전문채널들이 그를 지켜줄 수 있었습니까? 유튜브 등 1인 미디어들까지 등장한, 이미 변해버린 세상에서 정권의 방송 장악 시도는 부질없는 구시대적 작태일 뿐입니다. 만능도 아닌 방송을 장악해보겠다고 정권이 바뀌면 무리해서 공영방송의 사장과 임원진을 바꾸고 유관 기관의 장을 교체해봤자 민심 이반 외에 정권이 얻을 것은 거의 없다고 할 것입니다. 방송계가 반성해야 할 것은 검언 유착이나 권언유착 시비 같은 것으로 정치 싸움판의 중심에 서거나, 말도 안되는 광우병 주장이나 도쿄 올림픽 개막식 때 저지른 국격 실추 생중계, 마치 응원하는 것과도 같은 국수주의적인 국제스포츠 중계 등의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송의 중립성을 지키고 프로그램의 질을 높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광복의 달 8월에 저는 우리의 국력에 걸맞지 않게 뒤떨어진 공영방송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방송의 광복을 희망합니다. 어느 정당이건 방송의 공정성을 강조하면서도 집권하면 장악하는 것이 이제는 상식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국민이 주인인 방송은 영원합니다. 오는 대통령 선거 때 저는 가식적인 선거용 구호가 아닌, 진심으로 방송을 주인인 국민에게 돌려줄 후보를 찾아 한 표를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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