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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식(蠶食)’과 ‘걸식(乞食)’

  • 최태호 스페셜 칼럼 webmaster@kukmini.com
  • 입력 2021.08.30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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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 중부대 한국어 교수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 교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돌아보면 슬펐던 기억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먹고 살기 힘든 시대라 그럴 수도 있지만 멱감고 참외 서리하던 즐거운 추억은 그리 많지 않고, 뽕잎 따고 목화 따던 힘들었던 일들이 더 많이 생각난다. 그중 아주 힘들었던 일 중의 하나가 뽕밭을 없애고 일반 밭으로 만들었던 기억이다. 몇 살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몹시도 추운 겨울에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뽕밭을 없애게 되었다. 뽕나무는 뿌리가 강해서 쟁기가 잘 부러지기 때문에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4형제였지만 막내는 너무 어려서 필자까지만 동원됐던 것 같다. 나무를 톱으로 베고, 삽으로 판 다음 뿌리를 제거하는데, 언 땅이라 하나 제거하는데 하루 종일 걸릴 정도였다. 할아버지께서는 “그까짓게 뭐가 힘들어! 쓱쓱 잘라서 툭툭 치면 되는 것을……” 하고 말씀하시는데 얼마나 서러웠는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지금은 모두 추억이 돼서 형님과 그 시절 그 노래를 되새기면서 쓴웃음만 짓는다.

누에를 치면 따뜻한 방은 잠실로 변한다. 지금 강남에 있는 ‘잠실’도 아마 누에를 많이 치던 곳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한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그곳은 텅 빈 땅에 땅콩농사 짓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누에 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임이 틀림없다. 누에는 하루 종일 먹기만 한다. 여러 마리가 사각사각 먹는 소리가 옆에서 들으면 우레소리(?) 만큼 커서 잠도 자기 힘들다. 하루 종일 먹으니 빨리 성장하고 빨리 고치를 만든다. 잠식(蠶食)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유래했다. 야금야금 먹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 돌아보면 나뭇가지가 줄기만 달랑 남아 있다. 그러면 다시 싱싱한 뽕잎으로 갈아 주곤했다. 누에가 갈아먹듯이 별것 아닌 것 같은데, 금방 다 먹어 치운 것이 ‘잠식(蠶食)’이다. 이것이 변해서 지금은 “눈치 못채게 조금씩 침범해서 어떤 이익이나 영역을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예문으로는

①에어컨은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선풍기가 차지하고 있던 가정 냉방 용품 영역을 빠른 속도로 잠식해 가고 있다.(<다음 어학사전>에서 인용)

②외국 자본은 국내 시장을 잠식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상동)

등이 있다.

한편 걸식(乞食)이라는 단어는 불교에서 유래하였다. 요즘은 걸인(乞人)들이 별로 없지만 40년 전까지만 해도 길거리에는 거지들이 많았다. 깡통에 밥을 얻으러 다니던 아이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요즘은 그나마 노숙자(露宿者)만 보일 뿐이다. 노숙자들은 거지와는 다르다. 이들은 돈만 구하지 밥을 구하지는 않는다. 돈으로 구걸하여 술을 사 먹는 경우는 있지만 밥을 달라고 깡통을 들고 다니지는 않는다. 걸식은 불교의 걸사남(乞士男), 걸사녀(乞士女)에서 근원을 둔 말이다. 스님들은 걸식(乞食)하는 것을 수행의 하나로 여겼다. 지금도 태국에 가면 아침마다 걸식하기 위해 도로를 누비는 스님들을 볼 수 있다. <좌전>에 의하면 “乞食于野人(야인에게 밥을 빌다)”라고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걸인(乞人)이 ‘거지’로 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 번역할 때 산스크리트어를 중국어로 옮기고, 중국어(한자)를 다시 우리말로 옮길 때 ‘보시한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도 걸식이라고 했다.(서정범, <새국어어원사전>) 걸식하는 수행승인 비구, 비구니에서 걸식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걸사남, 걸사녀가 자신의 색신(色身: 육체)을 구하기 위해 먹을 것을 다른 사람에게 비는 것도 청정한 생활이라고 한다. 우리 옛 속담에 “가을 중 쏘다니듯 한다.”는 말이 있다. 가을에 열심히 탁발해야 겨울을 편안하게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여 인터넷이나 카드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세상이 되었다. 어영부영하다가 아프카니스탄처럼 탈레반에게 잠식당하지 않도록 하고, 걸식하게 되기 전에 정신차리고 나라 사랑하는 정신을 길러야겠다. 수행으로 걸식하는 것은 좋지만 나라 잃고 걸식하게 되면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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